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앤드루 존슨 (문단 편집) === 대통령 재임 시절 ===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슨은 초기만 해도 오히려 공화당 급진파 지도자 중 한명인 Chandler 상원의원에게 자신만큼 급진적이라는 평도 받을 정도로 (당시 압도적 인기를 가지고 있던 야당인) 공화당과 원만한 관계를 가졌으나, 지나친 남부 유화책 등으로 점점 사이가 멀어져 급진파가 장악한 의회의 인권법 등 여러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에 급진파는 압도적인 의석수로 대통령의 거부권을 찍어누르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을 반복하였다. 실제 존슨은 자유민은 되었지만 여전히 차별받던 흑인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린치를 당하는 등 차별은 여전했다.] 무관심했다. 해방노예국 기한 연장 거부 등 해방 노예들에 대한 지원 법안을 무르고[* 토지 분배,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지원하는 정책이었으나, 존슨은 이를 '백인에 대한 역차별'이라 주장하며 폐지했다.], 심지어 [[쿠 클럭스 클랜|KKK]] 같은 인종 차별주의를 근간에 둔 불법 폭력 집단의 준동을 방치하는 등 흑인들을 사실상 2등 국민 취급하였다. 존슨은 위에서 보았듯 스스로도 노예를 소유했던 인물이었고 노예제 찬성론자였으며 노예 지원 법안 폐지에 관한 발언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백인 우월주의 사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링컨의 부통령이었다고?~~ 1865년 1월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은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을 마치고 군정장관 자격으로 40만 에이커에 달하는 백인 농장주의 토지를 몰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를 나눠 노예였던 흑인 난민들에게 땅 40에이커와 노새 한마리씩을 분배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하지만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존슨은 재건 법령 제1조로 이를 전면 무효화시키고 토지를 백인 농장주들에게 반환했다. 흑인들은 생계를 위해 소작농이 되어 예전과 똑같이 가혹한 착취를 겪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66년 남부 홈스테드법으로 남부의 공유지를 흑인들과 백인 연방주의자들에게 판매했으나 가난한 흑인 소작농들에게는 토지 구매 비용이 없었고 결국 군정 해제와 함께 법도 폐지되었다. 공유지는 백인 투기꾼들과 목축업자에게 돌아갔고 결국 남부의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흑인들의 빈곤문제를 해결할 토지개혁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공화당에게는 '인종차별주의자, 인간 쓰레기, 당의 배신자'라 불렸다. 그렇다고 민주당을 비롯한 남부에게 지지를 받았냐면 그것 역시 아닌게 사실상 공화당에 붙은 '남부의 배신자' 등의 소리를 들으며 남부쪽의 지지도 영 시원찮았다. 이렇게 양 당 모두에게 찍힌 존슨은 국방부장관 에드윈 스탠턴이 헌법은 '모든 권력은 의회에 있다'고 적혀있으니, 자신의 충성 대상은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있다고 선언한 '스탠턴 사건'을 통해 자멸했다. --정치적 입지로만 보면 좀 불쌍하기도 하다.-- 당시 공화당 급진파들이 주도했던 상하원에서 (존슨을 길들이기 위해) 1867년 "육군 통솔법"과 "공직 보장법"을 통과시킨 상황이었기 때문에 존슨 대통령이 장관 등을 해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에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결국 상원이 해임동의안을 의결하는데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존슨의 의지로 스탠턴은 기어이 해임되었다. ~~결국 나중에 의결해줬지만서도~~ 정확히는 탄핵이 부결된 후 스탠턴의 사임으로 해결을 봤다. 참고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이 사람 재임 중에 발생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고종(대한제국)|고종]]. 물론 민간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독단적으로 벌인 만행이기에 뒤늦게서야 이 소식을 접하고 두 번 선박을 파견해 사실 관계를 확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